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토머스 하워드 (문단 편집) == 생애 == 노퍽 공작가는 원래 [[헨리 7세]]가 등극 전 [[리처드 3세]]에게 제 1대 노퍽 공작으로 임명받은 존 하워드가 리처드 3세를 지지해서 싸우다 보즈워스 전투에서 전사했고, 이 때문에 그의 아들인 2대 노퍽 공작은 노퍽 공작 작위를 몰수당했었으나 이후 다시 [[공작(작위)|공작]]으로 복위했다. 헨리 7세가 보즈위스에서 승리하고 귀족들을 소집했을때는 잉글랜드-웨일즈에 귀족 가문이라곤 29개 가문만이 응했고 헨리 8세 시절까지 복구된 가문을 합쳐도 약 50여 개에 불과했는데 왕족이 아닌 공작 가문은 노퍽 공작이 유일했기 때문에 잉글랜드에서 왕실을 빼면 가장 뼈대있는 집안이었다. [[튜더 왕조]]는 헨리 8세를 제외하곤 [[남계혈족]]이 남지 않았고 [[랭커스터 가문]]과 [[요크 가문]]의 남계는 [[장미 전쟁]] 과정과 사후 처리에서 숙청되었기 때문이다. 조카딸 [[앤 불린]]과 [[캐서린 하워드]]가 [[헨리 8세]]의 왕비로 오르는 과정을 지원하였다가 후에 두 왕비가 몰락하는 과정에서 발을 빼어 살아남았다. [[아버지]]는 제2대 노퍽 공작 토머스 하워드([[이름]]이 같다), [[어머니]]는 엘리자베스 틸니. 외가 쪽으로는 [[에드워드 1세]]의 후손이었다. 첫 아내는 [[에드워드 4세]]의 딸 [[요크의 앤]](Anne of York) [[공주]]였고, 두번째 아내는 엘리자베스 스태포드로 제3대 버킹엄 공작인 에드워드 스태포드와 제4대 노섬버랜드 백작 헨리 퍼시[* [[앤 불린]]이 왕의 눈에 들기 전 결혼하려다 실패했던 [[헨리 퍼시]]의 할아버지.]의 딸 엘리노어 퍼시의 딸이었다. 엘리자베스 스태포드와는 처음에는 사이가 좋았으나 후에는 심하게 악화되었다. 그는 엘리자베스 홀랜드라는 정부를 아예 집에 공공연히 들여 살게 했고, 부인은 결국 토머스와 갈라섰으며 후에 남편이 자기를 거의 감금시키고 생활비도 적게 주었을 뿐만 아니라 신체적으로 학대도 했다고 말했다. 군사적으로 상당히 활약했다. [[1536년]] 헨리 8세의 [[종교개혁]]에 반하여 은총의 순례(Pilgrimage of Grace)라는 민중 봉기가 일어났을 때 토머스 하워드는 반란군에게 사면을 제안하면서 해산을 촉구했다. 이듬해 다시 반란이 일어나자 그는 무자비하게 반란군을 탄압했다. [[헨리 8세]]의 왕비 [[아라곤의 카탈리나]]가 [[아들]]을 낳지 못하자 헨리 8세는 노퍽 공작의 조카딸이자 젊고 재치있는 [[앤 불린]]과 결혼하여 후사를 보아야겠다고 마음을 먹는다. 이로 인해 잉글랜드는 왕의 결혼 무효화 신청을 거부한 로마 [[교황청]]과 대립하고, 결국 수장령을 통해 영국 [[성공회]]를 [[국교]]로 수립하면서 완전히 가톨릭과 갈라선다. 조카 앤을 왕비 자리에 앉히기 위해 공작은 불린 가문과 [[헨리 8세]]의 오른팔이자 종교개혁 지지자였던 [[토머스 크롬웰]]과 협력했다. 8년의 노력 후 [[앤 불린]]은 마침내 잉글랜드의 왕비가 되었으나, 딸 엘리자베스를 낳은 이후 아들을 낳지 못해 왕의 [[사랑]]을 잃기 시작했다. 공작과 앤의 사이는 틀어졌고, 그는 앤 불린의 [[재판]]에서 앤에게 [[화형]] 또는 [[참수형]]을 언도하면서 앤 불린과의 관계에서 손을 씻어버린다. [[종교개혁]]으로 가톨릭과 개신교의 대립이 심했던 시대, 노퍽 공작은 가톨릭 세력의 선봉장이기도 했다. 종교개혁 지지자이자 여러모로 정치적 이견이 있었던 [[토머스 크롬웰]]과의 사이는 이제 악화일로를 걸었다. [[1540년]] [[클레페의 앤]]과의 결혼을 주선한 후 왕의 신임을 잃은 토머스 크롬웰이 체포되던 순간, 공작은 크롬웰이 목에 걸고 있던 가터 훈장을 나타내는 목걸이를 손수 뜯어버리면서 복수를 음미했다. 그는 이 때 이미 클레페의 앤을 대신할 후보로 조카딸 [[캐서린 하워드]]를 미는 중이었고, 크롬웰이 처형을 당하던 날 캐서린 하워드는 헨리 8세와 결혼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캐서린이 [[처녀]] 시절의 성생활과 [[불륜]] 혐의로 [[런던탑]]에 수감되자 왕은 하워드 가문이 캐서린의 과거를 숨기고 자신을 기만했다고 분노했다. 캐서린 하워드는 사권 박탈법(bill of attainder)에 의해 처형되고 하워드 가문의 여러 사람들이 런던탑에 갇히게 된다. 하지만 노퍽 공작 토머스 하워드는 다시 멀쩡하게 궁정에 복귀했다! 헨리 8세의 [[말년]], 왕의 유일한 [[남성]] [[후계자]]인 [[에드워드 6세]]를 낳은 헨리의 세번째 왕비 [[제인 시모어]]의 친정인 시모어 가문이 득세한다. 시모어 가문은 [[프로테스탄트]]로 가톨릭인 노퍽 공작과는 대립할 수 밖에 없었다. 노퍽 공작은 딸을 시모어 가문의 두 아들 중 하나인 토머스 시모어와 결혼시켜 어떻게든 [[동맹]]을 맺으려 했지만, 장남인 서리 백작 헨리 하워드가 [[왕가]]의 문장인 [[에드워드 참회왕]](Edward the Confessor)의 [[문장]]을 개인 문장에 포함시키는 등 사고를 일삼아 이는 실패한다. [[1546년]] 노퍽 공작 토머스 하워드와 헨리 부자는 나란히 반역 혐의로 런던탑에 수감되고, 이듬해 토마스 하워드는 아들놈을 통제하지 못해 반역을 숨긴 죄를 고백하면서 봉토를 왕에게 반환했다. 가족들에게서도 인심을 잃었던 건지, 아니면 가족도 그처럼 기회주의자였는지는 몰라도 공작의 부인 엘리자베스 스태포드(별거 중인 부인), 정부 엘리자베스 홀랜드, 딸 메리는 모두 그에게 불리한 [[증언]]을 했다. 장남 서리 백작 헨리 하워드는 결국 참수당했다. 헨리 8세는 노퍽 공작인 토마스 하워드도 사형시키라는 명을 내리고 눈을 감았지만, 왕이 승하하고 나자 의회는 노퍽 공작을 사면했다. 토마스 하워드는 [[에드워드 6세]]의 즉위기간 동안 계속 런던탑에 갇혀 있다가 가톨릭을 지지한 [[메리 1세]]가 즉위하면서 풀려났다! ~~운도 좋다.~~ 메리 1세가 독실한 가톨릭 신자로서 잉글랜드를 다시 가톨릭 국가로 돌려놓으려는 야심을 품고 있었기에 노퍽 공작은 다시 한번 득세할 수 있었다. ~~[[불사조]]~~ [[추밀원]]에도 입성했을 뿐 아니라 문장원 총재(Earl Marshal)[* 이 직위는 지금도 하워드 가문 후손들이 이어받고 있으며 영국에서 왕가를 제외하고는 가장 높은 직위이기도 하다. 현재 문장원 총재는 1956년생인 에드워드 윌리엄 피츠알란-하워드.]로도 임명 받았고, 메리 1세의 [[대관식]]에 참여하기도 했다. 수 차례 목이 달아날 위기를 넘기고 근성 있게 살아남은 그는 [[1554년]] [[8월 25일]] 눈을 감았다. 장남인 서리 백작 헨리 하워드의 아들이자 본 항목의 손자이며 [[동명이인]]인[* 사실 하워드 가문에는 노퍽 공작이 된 토머스 하워드가 너무 많아 정확하게 부르려면 몇 대 노퍽 공작인지를 명시해야 한다. 당장 본문의 토마스 하워드는 2, 3대 노퍽 공작이며, 4, 5, 8대 노퍽 공작의 이름도 모두 토머스 하워드다. 이런 식으로 대를 이어 이름을 물려받는 건 서양권에서 흔하다.] 토머스 하워드(제 4대 노퍽 공작)는 노퍽 공작 작위를 물려 받았는데, [[엘리자베스 1세]] 시절 [[스코틀랜드]]의 [[메리 1세(스코틀랜드)|메리 여왕]]과의 결혼을 허가받았으나 가톨릭 세력의 구심점이 되어 경고를 여러 차례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반란에 연루되어 참수 당한다. 그러나 하워드 가문은 기적적(?)으로 살아남아 노퍽 공작 작위는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그리고 전술한 대로 [[왕족]]을 제외하면 가장 오래된 공작 [[작위]]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